[소설] 모든 저녁이 저물 때

2018. 7. 13. 10:42 | Posted by 꿈꾸는코난


< 모든 저녁이 저물 때 > |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 배수아 옮김 | 한길사


지난 여름만 해도 우리는 여기서 기차를 타고 마리엔바트로 갔다.

그런데 이제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 W.G. 제발트, <아우스터리츠> 중에서


도서서평단에 선정되고 처음 든 생각은, 소설이기 때문에 조금 편하게 읽고 쉽게 글을 적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생각보다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뭐랄까 일단 처음에는 소설의 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전반적으로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있었고 그 다음은 전반적으로 서술되는 문장 자체가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책을 덮을 때 죽음이라는 부분과 시대적 상황 등등 다양한 면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게 만드는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으며 중간 중간 포스트잇을 붙이다 보니 과연 내가 소설을 읽고 있나 하는 느낌도 들었지만 그 포스트잇의 숫자만큼 이해의 폭도 넓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신이 주셨고 신이 거두어갔다.                                                          - p. 11 -


이 소설은 한 여자에 대해 어린 시절의 죽음과 '만약에 ~~ 했더라면' 이라는 가정을 통해 죽음을 번복하고 이러한 과정을 반복해서 총 5번의 죽음을 보여주고 있다. 각각의 죽음에 대한 시대적인 상황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나치정권, 소비에트정권, 독일통일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격변의 시기를 살아간 한 여자의 삶과 선택에 대해 잘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괴테 전집을 읽는 걸 단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지금 전집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책장에, 작은 괘종시계곁에 고스란히 꽂혀 있다. 그래서 어머니의 피난 가방이 그처럼 무거웠던 것이다.                                                      - p.141 -


이 소설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언급되는 하나의 요소가 괴테 전집이다. 여자의 어머니의 어머니때 부터 여자의 아들까지 시대를 거쳐 변동의 소용돌이에 살아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녀는, 책등이 살짝 망가진 제9권에서, 아직도 상당 부분을 암송할 수 있는 그 희곡을 찾아낸다. 그녀는 불을 피우지 않고, ..., 담요를 두르고, 오래전 어린 소녀일 때 그랬던 것처럼 < 이피게니아 >를 읽는다.                                                   - p.143 -


괴테는 < 이피게니아 > 작품을 통해 여성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인물상을 구현하고 있다. 연약한 여성이지만 당면한 운명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개척해 나가는 모습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여자가 당면한 시대적인 상황을 헤처나가는 모습을 연상시켜 볼 수 있을 것 같다.


죽음이 닥쳤을 때, 당신이 무엇을 위해서 죽는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 그러면 갑자기 충격적일 만큼 선명하게, 절대 암흑의 공허가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인간은 후회없는 죽음을 원하지만, 목숨을 바칠 만큼 중요한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 p.195 -


오래전, 한  사람이 하나의 말을 하고, 다른 사람은 다른 말을 하여, 말들이 공기를 움직였고 말들이 잉크를 사용해 종이에 적혀 서류철에 묶였다. 공기는 공기로 상쇄되고 잉크는 잉크로 상쇄되었다. 공기의 말과 잉크의 말이 실제 사물로 변화하는 그 경계를 인간이 볼 수 없다는 건 참으로 아쉽다.                                            - p.210 -


수많은 아침을, 그는 이렇게 이른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다. 오직 그 혼자에게만 속한 시간. 그는 부엌으로 가서, 그곳에서 일생동안 한번도 해보지 못한 방식으로 울 것이다. ..., 인간이 슬픔을 발산하는 길은 정녕 이런 괴상한 소리와 부들거리는 경련밖에는 없는지, 그는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 p.304 -



'한 사람이 죽은 하루가 저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이 저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라는 말을 통해 죽음과 세상과 그 사이를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주는 것 같다.